[스크랩] [산상수훈]마태 5:7, 긍휼이 여기는 자는
마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들어가면서
여리고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거의 죽게 된 이 사람 옆에 한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이 두 사람의 경우 아마도 동정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별 볼일 없는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길가에서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상상할 수 없는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그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올 때에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단순히 동정이나 측은한 감정이 아니고 그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일과 이익을 잊어버리고 구체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이 이 이야기가 성경에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긍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긍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긍휼은 무엇인가
긍휼은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헷세드’ 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약 150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주로 하나님의 성품이나 행동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단어였습니다. ‘변함없는 사랑’, ‘친절’, ‘따뜻한 마음’ 으로도 번역됩니다.
본래 긍휼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마음 속에는 용서하고 치유하는 긍휼이 없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며 무한히 용서하시는 마음입니다.
신약 헬라어에서는 엘레오스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27회나 나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에 의하면 모든 제사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긍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긍휼이란 나의 죄 때문에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비참한 상태 속에 빠져 있던 나를 하나님께서 오히려 불쌍히 여겨 주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팔복의 순서를 되는대로 함부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일정한 뚜렷한 전개의 흐름이 이어지고 논리적인 연속이 있습니다. 팔복의 복 하나하나가 앞의 복들의 뒤를 잇고 있습니다. 앞의 복들을 이렇게 연결시켜보겠습니다.
‘나는 심령이 가난하다’ 나는 철저하게 무능력함을 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애통하다’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내 속의 죄를 보았다.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라는 외침이 내 속의 타락성을 제기한다.
‘나는 온유하다.’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나야말로 참으로 가증한 자이다.
“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절망적인 상태를 보았다.
그럼, 이제 내가 이것을 보았고 체험했으니,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전적으로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제 그들을 기독교인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을 속고 있는 사람들로, 사단과 세상 길의 노예로 봅니다. 나는 그들을 싫어하는 사람들로만 보지 않고 불쌍히 여겨야 할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나는 죄인과 그의 죄를 구별합니다. 나는 죄의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할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긍휼을 어떻게 보였습니까?
죄를 결코 지으신 일이 없고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 해를 주지 않으시고 와서 진리를 설교했고,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하려 오신,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을 보십시오. 십자가 위에 못박혀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보십시오. 하지만 자기를 못박은 사람들을 바라보실 때 주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어째서 입니까? ‘저들이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니라 사단이었습니다. 그들은 희생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죄의 통제와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한 순교자 스데반을 바라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스데반에게 돌을 던질 때 그는 무엇이라 말했겠습니까? 스데반은 하늘 아버지에게 기도하며 외치기를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죄 때문에 미쳤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겼고 그들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긍휼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용서와 사랑과 은혜와 정의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긍휼, 용서, 은혜, 정의
바울의 서신은 대부분 서두에 ‘은혜와 평강’으로 시작하지만, 목회서신에서는 ‘은혜와 긍휼과 평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죄를 지은 사람들과 특히 관련되고, 긍휼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특히 관련이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은혜가 죄를 전체로써 내려다보는 반면에 긍휼은 특히 죄의 비참한 결과를 내려다 보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불쌍한 생가과 고통을 제거하려는 의욕이 합쳐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긍휼의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긍휼은 측은심과 행동이 합쳐진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긍휼에서 용서가 흘러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디도서 3장 5절에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즉 긍휼이 동기가 되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주신 것입니다.
둘째, 긍휼에서부터 용서가 흘러나왔다면, 그 긍휼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생긴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5절에 보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라고 했습니다. 결국은 조건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셋째로, 긍휼은 은혜보다 더 깊고 구체적인 뜻이 있습니다.
즉 은혜는 죄 자체를 용서해주는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이지만 긍휼은 죄의결과가 낳은 고통과 비참함과 절망을 치료하여 주고 새롭게 해주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 긍휼이 있습니다.
넷째, 긍휼이라고 죄를 용납해주거나 불의를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긍휼이 죄의 절망과 비참함을 다루어 주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분의 공의와 상치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은 기독교 구원의 모든 것을 다 내포하고 있는 말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확신한 성도들은 긍휼의 삶을 살기 위하여 오지에 선교사로 나가기도 했으며, 고아원과 불우이웃을 위한 병원을 운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긍휼은 크리스챤의 마크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비극이 있다면, 그것을 세상을 향한 진실한 긍휼의 상실에 있습니다. 긍휼이 나타난 것 중의 최대는 영혼구원에 있습니다. 그 영혼이 지옥에 갈 것을 생각하고 잠 못 이루며 통곡하는 심정을 가진 긍휼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긍휼을 베풀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긍휼의 결과는 무엇인가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포셔라는 주인공의 말을 빌어 세익스피어는 긍휼을이렇게 정의합니다.
‘긍휼은 고요히 내리는 빗방울처럼 긍휼을 베푸는 사람과 긍휼을 받는 사람을 다함께 축복한다’
좋은 씨를 뿌리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긍휼을 심으면 긍휼의 열매를 얻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도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아마도 최후의 심판 때 긍휼없이 천국에 들어갈 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긍휼은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절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8장 24절이하입니다.
어떤 주인이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를 용서해 준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종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종을 불쌍히 여긴 주인은 그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종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런데 탕감을 받고 나간 후에 그 종은 자기에게 빚진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빚은 백 데나리온으로서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실로 새발의 피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받은 긍휼은 모드 잊어버리고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관의 목을 잡고 야단을 치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것을 보다 못해 화가 난 동료 동관들이 주인에게 말을 했을 때 그 주인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악한 종아 네기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마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긍휼을 입은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어떻게 긍휼을 베푸는가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삶을 한 평생의 과제로 알고 추구해 온 헨리 나우엔은용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세가지 중요한 권면을 합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묵상하고, 조건없이 용서하기로 결단하며, 정말 싫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긍휼의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 자신이 긍휼함을 입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 2;4)’ 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를 묵상해 보십시오.
둘째로, 긍휼을 마음과 생각에 머물게 하지 마시고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십시오. 신명기와 야보고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팍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펴서 그 요구하는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신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셋째로,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때 긍휼의 마음이 생깁니다. 기도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의긍휼의 옷을 입게 됩니다. 특별히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좌절할 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힘을 주실 것입니다.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이웃이란 오직 긍휼의 대상이요 기도의 대상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실수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고통을 주고 손해를 끼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 긍휼히 여겨야 할 그 대상입니다.
유토피아론을 주창했던 토마스모아는 그 자신이 유토피아를 말했지만 그의삶은 고통의 삶이었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진술을 요청받았을 때 자기에게 사형을 내린 재판관을 향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재판관이시여 당신은 나에게 사형언도를 내렸지만 저 천국에서 나는 당신과 친구가 되어 만나고 싶소. 바울과 스데반처럼 스데반을 죽이는데 사울이라는 사람도 한몫 했습니다. 그러나 두사람은 천국에서 친구로 만났을 것입니다. 나도 당신과 천국에서 친구로 만나 영원을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재판관이 묻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사형을 언도했는데, 당신은 어째서 나에게 그런 선의의 말을 던지십니까?’ 토마스모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나를 그렇게 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자와 불신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종착역은 지옥입니다. 이것보다 더 커다란 비참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이 지옥을 피할 수가 없을 때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대상이었을 때,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나를 그 지옥에서 건져 주시사 천국의 아들로 삼아 주신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마무리
디모데후서 1장 16-18절에 바울이 로마에서 포로 되어 있을 때, 자기를 불쌍히 여겨서 방문한 오네시보로를 회상하며 그에 관한 글을 삽입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 날에 주께서 자비를 그에게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덧붙였습니다.
최후의 날에 우리는 모두 긍휼이 필요할 것입니다. 종말의 날에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서 몸으로 행한 행실의 기록을 직고할 때 이 긍휼이 필요할 것입니다. 분명코 그릇되고 사악한 일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 날에 긍휼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들 속에 있을진대, 주님의 영이 우리들 속에 있고 우리가 긍휼할진대 우리는 그 날에 긍휼을 받을 것입니다. 나로 긍휼하게끔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긍휼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즉 내가 만일 긍휼하지 못하다면, 여기에는 오직 한가지 설명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밖에 있으며 아직 죄 속에 있으며,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긍휼합니까? 죄인들이 여러분에게 죄를 짓고 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 죄인들을 불쌍히 여깁니까?
여러분은 세상과 혈육과 마귀의 희생물이요 속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깁니까?
이것이 시금석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긍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