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산상수훈]마태 5:1-3, 심령이 가난하니
마태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우리는 간혹 크리스천의 삶의 원리가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질문에 가장 적절한 답변이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도덕의 근본이라 불리우는 산상수훈입니다. ‘천국 대헌장’이라고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산상수훈의 시작입니다.
이 산상수훈은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인가요?
1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온지라
‘무리’는 예수님이 갈릴리를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여러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을 보고 듣고 쫓아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시고 갑자기 산에 올라가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무리는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무리의 환호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산에서 조용히 천국의 진리와 크리스챤의 삶의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기독교는 대중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대중 속에 빠져있지는 않습니다. 기독교는 민중 속에서 존재하지만 민중의 허상 속에 기독교가 함께 춤을 추지는 않습니다.
헌신은 언제나 소수였고,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은 소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소수의 제자들이 세계를 그리스도 앞에 드린 것입니다. 여기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도 이 소수에 포함됩니다.
1절에 ‘앉으셨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앉아서 가르치셨다고 하는 것은 길을 걷거나 서서 대화를 나누는 것과는 다릅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중요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선포하거나 가르칠 때는 언제나 앉아서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즉흥적으로 설교를 하신 것이 아니라 천국의 진리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말씀을 전개해 나간 것입니다.
2절에 ‘입을 열어’ 라고 되어 있습니다. 굳이 ‘입을 열어’ 라고 한 것은 앞으로 선포된 말씀이 중요한 것이라는 암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앞에 무리라고 설명했는데 다시 제자들이라고 한 것은 특히 제자들에게 교훈을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천국을 굉장히 많이 말합니다. 무려 34회입니다. 천국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천국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마태복음에는 천국이라 했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나님 나라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실 이 두 단어에서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하겠습니다.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할 때 독자 대상을 유대인으로 삼았고, 유대인들은 물질적 의미의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천국은 하늘에 있는 나라이다. 천국은 영적인 나라이다.”라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늘나라 개념을 정정해 주려는 것입니다.
이 산상설교는 ‘천국의 기준’입니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그대로 못하면 기준을 낮추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따라가고 못 따라가는 것은 우리의 문제이므로 결코 성경의 기준을 낮추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타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가 세상의 기준에 맞추는 것입니다. 신앙의 타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자가 삶의 기준을 스스로 낮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 기준’이 적용되어야 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늘의 기준은 예수님이 사셨던 기준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기준대로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볼 때 우리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3절에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의 가난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소심하거나, 자신 없는 것이나, 용기가 부족하거나, 교제를 싫어하거나, 수줍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성을 억압하거나 큰 희생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학자들의 겸손을 논할 때와 같은 의미의 겸손도 아닙니다. 학자들의 겸손은 그 겸손이 지식의 광대함을 의식한데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로코스’ 입니다. 이 단어는 철저하게 가난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보통 가난이 아닙니다. 파산지경에 처한 절대적인 가난입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아주 급진적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궁지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지하지는 않고는 생존 그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어느 날 바리새인과 세리가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러 왔습니다. 바리새인은 내심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지킨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거룩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세리는 매국노요 손가락질 당하는 쓰레기 같은 존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만만하게 성전 맨 앞자리까지 들어가더니 두 손을 번쩍 들고 머리를 하늘로 쳐들고는 눈을 뜨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이 세상의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사람입니다. 토색하거나, 간음하거나, 악한 일을 하는 사람과 다릅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기도하고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마음이 부한 자라고 하십니다. 심령에 무엇인가를 가득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내가 선하고 더 거룩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영적 교만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고 그런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악한 마음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꼭 기억하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의 상태가 교만입니다. 마음에 무엇인가를 가득 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세가 교만입니다. 바로 바리새인이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한편, 세리는 감히 성전 앞자리까지 갈수가 없었습니다. 뒷자리 구석에서 고개를 숙인 채 가슴을 치면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저 이 한마디만 고백할 뿐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하는 단어가 있으니 ‘저희 것임이라’ 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만이 천국을 소유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천국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경험할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 무디 목사가 한 도시에서 전도대회를 열었습니다. 신문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너무 바빠서 그 인터뷰에 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튿날 신문 기사마다 ‘교만한 전도자 무디’라는 비판적인 기사가 실렸습니다. 참모들이 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무디는 태연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교만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화가 나지 않으세요?” 그랬더니 무미가 말합니다. “몰라서 그래, 진짜 나를 알면 그렇게 안써, 나는 그보다 훨씬 더 교만한 인간인걸”
이 얼마나 놀라운 생각입니까? ‘신앙인은 자기가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최고로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다’ 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겸손의 덕을 이미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의 행실, 나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의 의, 나의 선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달려가야 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고, 주 앞에 나와서 의지하는 자를 의롭다고 해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느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낮아지는 마음을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 세상의 소망을 모두 끊어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자비가 채워지기를 바라는 겸손한 자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복종한 상태이며,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심령이 가난한 것의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모세를 보겠습니다. 모세는 애굽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으로서 40년을 삽니다. 그러다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살인을 하게 됩니다. 살인자의 모습으로 풀 한 포기 없는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그의 삶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삶입니다.
모세는 어느 날 호렙산에서 “네 백성을 탈출시켜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저는 아닙니다.”라고 네 번씩이나 거절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문둥병이 걸리게 했다가 고쳐주기도 하시고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게 되는 기적도 보여주십니다.
모세는 그래도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보좌와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게 되고 스랍(천사)들이 나타나 말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면서 창화(시나 노래를 한쪽이 부르고 한쪽이 화답하는) 할 때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며 이렇게 외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베드로를 봅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백전 노장 업으로 하던 어부가 못 잡고 있는데 주님이 어디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가 순종합니다. 그리고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힙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주여 나를 떠나시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을 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자기가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는 줄 알고 교만한 가운데 상당한 긍지를 느끼며 살았습니다.
빌립보 3장에서 자신이 자랑할 만한 것을 설명하면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바리새인,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최고의 문벌을 가진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이러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난 후로 그는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 자기의 자랑거리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의 서신을 읽으면 그가 그의 생애 끝까지 싸워야 했던 싸움은 자만에 대항하는 싸움이었습니다. 능력을 부여 받은 사람은 누구나 이것을 의식합니다. 그는 자기가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생애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립보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겸손을 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요 심령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사람의 모습으로 낮아지신 예수님, 그리고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심령이 가난한 마음의 전부입니다.
요한복음 14;10 에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 절대로 의존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입니다.
19세기 영국 고아원 설립자인 뭘러 목사에게 어떤 사람이 성공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뭘러 목사가 대답했습니다.
“그 날은 내가 철저하게 죽는 날이었습니다. 평판, 선택, 좋아함, 싫어함, 미움, 원망 등이 전부 죽게 되었고, 그것에 대해서 조금도 개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세상과 그 칭찬이나 비난에도 완전히 죽었습니다. 또한 형제나 친구들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하나님께서 어떤 칭찬을 하실까 라는 데만 마음을 쓰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뭘러의 성공은 그가 완전히 죽고 변화된 날에서부터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길입니다.
우리 신자된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그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기록된 그대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주여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말한 사도들의 반응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믿음이 너무 약하고 너무 빈약한 것을 느꼈습니다.
자,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볼수록 우리들 스스로 무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절대의 가난함과 아주 빈 공허함을 느끼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에게 말씀하십시오.
내 손에 있는 것은 하나도 없사오니
주여 당신의 십자가를 붙들 뿐입니다
속이 비고 무력하고 벌거벗은 죄인이지만, 주님은 항상 충족시켜 주십니다.
제게 필요한 것이 모두 당신에게만 있사오니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여. 주께로 가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 대헌장’을 배우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높아진 마음을 낮아지게 하시고, 교만한 마음을 헐어버리게 하옵소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표준대로 살 수 있는 능력과 거룩한 삶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삶이 곧 우리의 삶이 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7.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