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의 쓴물
BC 1446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의 여정에 나섰다. 출애굽에 참여한 숫자는 어른 60만명과 어린이 등 대략 2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의 여로는 광야 즉,사막이었다. 이들은 물을 담기 위해 가죽부대를 소지하고 있었다. 사막 여정에서 가장 절박하게 필요로 한 것은 물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이와 노약자,그리고 가축들과 함께 3일 동안 물 없이 광야를 걸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한 오아시스를 발견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마라(출 15:23)다. 그러나 거기에서 찾은 물은 정작 ‘쓴 물’(bitter?NIV)이어서 도저히 마실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지도자 모세를 향해 불평과 불만을 늘어놨다. “우리가 무엇을 마셔야 한단 말이오”(출 15:24)
번민하던 모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출 15:25)
입이 마르도록 여호와께 부르짖은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한 대로 나무를 물에 던졌다. 그 결과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쓴 물이 ‘단물’(sweet?NIV)로 변해 백성들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변한 사건을 놓고 신학자들을 포함,많은 이들은 기적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기적이라고 말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적어도 기적의 범주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과학적 측면에서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즉 열역학 제1법칙(질량 보존의 법칙)과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컨대 무에서 유로의 창조(창 1:1)나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요 2:1∼11) 등은 질량 보존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현상이다. 또한 예수가 폭풍이 몰아치는 갈릴리 호수를 걸어가신 사건(요 6:16∼21)은 중력의 법칙이 잠시 중단된 현상으로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적인 것이다.
그러나 쓴 물이 단물로 변한 것은 화학반응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비교적 설명이 명쾌하다. 그래서 기적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고 봐야 한다. 마라의 쓴 물은 물속에 쓴 맛을 내는 성분이 포함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음용수로서 물은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물속의 다양한 성분중 미네랄(광물질),특히 마그네슘이온과 칼슘이온이 얼마만금 녹아있느냐에 따라 센물(경수)과 단물(연수)로 나누어진다. 센물에는 이들이 다량 녹아있는 반면 단물은 그렇지 않다. 통상 우물물은 들판이나 광야의 지하수가 흐르다가 지표면으로 노출된 것이기 때문에 센물이라 할 수 있으며 강물은 단물에 속한다.
또한 물속의 수소이온농도(pH)에 따라 산성?중성?알칼리수로 나눌 수 있다(본보 2004년 10월7일자 ‘생명수를 찾아서’ 인터넷판 참조). 중성인 pH 7을 기준으로 수소이온농도가 7보다 낮으면 산성,그보다 높으면 알칼리수로 구분한다. 센물과 강산성수 그리고 강알칼리수는 음용수로서 부적당하다. 센물과 강알칼리수는 쓴 맛을 내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마라의 쓴 물은 음용수로 부적당한 센물이면서 강알카리수라는 분석이다. 쓴 물이 단물로 변하기 위한 조건은 산성 물질에 의한 ‘중화’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성서는 모세가 나무를 물에 던지니 쓴 물이 단물로 변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내용을 과학적으로 풀이하면 산성을 띤 나무가 쓴 물을 중화시켰다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떤 종류의 나무를 물속에 던져 쓴 물을 중화시켰을까. 마라지역에 자생하는 나무는 가늘고 가시가 많은 관목인 구르쿠드와 종려나무 등 2가지를 꼽을 수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종려나무는 야자나무의 일종인 대추야자나무를 가리킨다. 공교롭게도 구르쿠드 나무와 대추야자나무의 열매는 산성을 띠고 있다. 하지만 구르쿠드 나무의 열매는 극히 소량이어서 마라의 쓴 물을 중화시키기엔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라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베두인족들은 자생하는 대추야자나무의 덜 익은 열매로 알코올이나 식초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대추야자나무가 구르쿠드 나무보다 많다는 것이다. 마라 지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엘림 지역에도 우물이 12개가 있었고 종려나무가 70그루나 자생하고 있었다(출 15:27)는 것은 이를 잘 뒷받침해주고 있는 기록이다.
모세는 이런 화학반응의 메커니즘을 전혀 알지 못했으나 열매 달린 대추야자나무를 마라의 쓴 물에 던져넣어 단물로 중화시켰다. 만약 모세가 당시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치 않고 자신의 학문으로 그것을 분석?비판하면서 대추야자나무를 던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남병곤기자 nambgon@kmib.co.kr
◇도움말 주신 분 △한국창조과학회 △김영호 연구원(한국표준과학연구원 유기생물 분석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