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2차 세계대전 하면, 중심인물로서 생각나는 사람들이 히틀러, 무솔리니, 처칠입니다. 이들을 풍자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이들 3명이 잘 가꾸어진 정원의 연못에 있는 물고기 잡이에 내기를 걸었습니다. 먼저 히틀러는 권총을 뽑아 발사했습니다, 탄환은 물고기를 맞추지 못했습니다. 무솔리니는 연못에 직접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빠른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칠은 연못의 물을 퍼냈습니다. 부드러운 방법을 쓴 처칠이 이겼습니다. 2차대전 후에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악인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처칠은 국가 유공자가 들어가는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이름이 새겨지고 런던 피커딜리 공원에 동상이 서 있습니다.
이 세상은 힘과 능력이란 관점에서 정복관과 소유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고,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온유라는 단어가 당시에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우스’라고 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온유에 대해 이런문장으로 설명했습니다. ‘온유란 인간에게 주어진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힘이 잘 조절되어 그의 인격 속에 구현되는 덕이다’ 즉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힘이 잘 조절되어 내 인격 속에 나타나는 특성, 이것이 온유라는 태도의 핵심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단어는 주로 세가지 용례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첫째, 어떤 사람이 병을 앓아 고열로 고생하는데 치료 덕분에 한순간 그 열이 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제 괜찮다’는 말 대신에 프라우스라고 합니다. 이제 열이 잡혔다는 의미로 온유해 졌다. 즉 프라우스라 말합니다.
둘째, 사람들이 돌풍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와중에 일순 바람이 잦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말하기를 프라우스 즉 바람이 온유해졌다고 합니다.
셋째, 야생마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훈련을 시키게 됩니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서 야생마가 이제 사람들에게 위협의 안되고 길 들여졌을 때에 프라우스 즉 ‘온순해졌다’ 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세가지 경우에 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힘이 조절(컨트롤)되었다는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산업화 그리고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현대인이 잃기 시작한 현저한 삶의 태도가 있다면 자기 절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기 절제가 천연기념물 처럼 희귀해졌습니다.
온유란 무엇일까요?
온유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자신의 현 주소를 확인하는 자각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분수를 확인하는 증상입니다. 악의, 분노, 심판 같은 심령의 나쁜 상태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그들 자신의 힘과 조직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기드온의 이야기에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수를 늘리지 않고 수를 계속해서 줄이셨습니다. 이것이 영적 방법입니다. 그리고 여기 산상설교의 이 놀라운 진술에서 다시 한번 강조되었습니다. 각각의 복은 다은의 복을 암시하며 다음의 복으로 연결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심령의 가난에 근본이 되는 선결 조건이 나옵니다. 그 조건이란 우리가 죄를 알게 될 때 차례로 애통의 상태로 인도도기는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영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 그런 온유한 사람의 실례를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롯에 대한 행동을 기억하십니까. ‘네가 우 하면 나는 좌 할 것이고 네가 좌 하면 나는 우 할 것이다” 좋은 땅을 롯에게 양보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린 롯으로 하여금 비옥한 땅을 마음대로 선택하게 하고 불평 없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다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바로의 딸의 아들로서의 모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자기를 비천하게 생각하고,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하나님과 그의 뜻에 완전히 낮추었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시편 90편은 모세가 출애굽해서 40년 광야생활 속에서 보고 쓴 것입니다.
두가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인생이 짧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들꽃과 같습니다. 얼마나 우리의 인생이 짧은지 그 시간이 날아간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그런데 내내 죄만 짓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짧은 인생을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려고 싸우다가다 헛되이 지나가고 주의 진노 중에 그 생을 마감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세가 출애굽해서 40년 광야생활속에서 보고 쓴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없고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기를 쓰다가 죽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온유해 진 것은 악착같이 굴어봤다 며칠 안 남은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큰 소리 칠 것 같더니 어느 날 무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게 되고 헛것이더란 말입니다. 할 줄 아는 것이 기를 쓰는 것 밖에는 없더란 말입니다.
우리가 온유해 지는 데는 이런 이유가 필요합니다. 거짓말을 해도 화를 내지마십시오. 세상의 거짓말은 다 탄로 나는 법입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성경을 보십시오. 거짓말하고 속이는 자가 결국 스스로 망하게 됩니다. 그냥 두어도 됩니다.
다윗을 봅시다. 사울과의 관계를 보면 다윗은 자기가 왕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왕이 되리라는 전갈을 들었고,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울의 부당하고 불친절한 처리를 참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두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의 목숨을 해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겨두고 떠나갈 수 있었습니다.
에례미야를 봅시다. 그는 백성들에게 진실을 말해 주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에게 고립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외톨이, 왕따입니다. 그는 비통하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견디어냈으며, 자신이 소명받은 바를 충실하게 전달했습니다.
스데반을 봅시다. 스데반은 성경에서 묘사한 일물 중에 최고의 칭송을 받은사람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죽을 무렵에 그 얼굴이 천사같이 빛났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설교에는 3천명이 회심을 했지만 스데반의 설교에는 아무도 회심하지 않고 설교를 들은 이들이 돌을 들어 그를 쳐죽입니다. 그때 사형집행의 증인이 되고 책임자로 서 있었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본명은 사울입니다. 큰자 위대한자입니다. 그는 최고의 스승 밑에서공부한 바리새인 신앙입니다. 이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름을 바울, 즉 작은 자라고 고칩니다. 겸손히 주의 일에 수종드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능력이 있다든지 하나님이 자기를 통하여 일을 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지 못합니다. 나 같은 것도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받으신다는 것을 황송해 합니다. 디모데전서
이제 우리는 온유의 최고의 실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을 바라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소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발해와 경멸과 야유와 조롱을 참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이”란 말씀은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의 원수들에 대한 태도, 하지만 더구나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복종은 그의 온유를 보여 줍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내 속에 계시는 아버지의 말씀이다.” 겟세마네의 동산에서의 그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람으로 사시기를 결심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는 스스로 겸손하여 종과 같이 되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이것이 겸양입니다. 이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여기서 가르치시는 자질인 것입니다.
자 그럼 온유라 무엇입니까?
첫째로, 온유는 생래적 자질이 아닙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성령의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은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작정하시는 것입니다. 다윗 같은 강력하고도 특이한 성품에서도 온유를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끓는 가마솥 같다고 했지만 온유했습니다. 막강한 지도자요 강인한 인물인 사도 바울도 철저하게 겸손했고 온유했습니다.
둘째로, 온유는 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무기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인격이나 인물 됨이 연약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타협정신이나 어떤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얻는 평화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사람들입니다. 순교자들은 온유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단코 약하지는 않았습니다. 강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온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고상한 자질, 모든 자질 중에서 가장 숭고한 자질의 하나를 동물적인 육체적, 생래적인 것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온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온유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행동에서 표현되는 자기에 대한 올바른 견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두가지입니다.
온유는 나 자신에 대한 자세인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의나의 태도의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온유가 어떻게 해서 가난한 심령과 애통 에 뒤이어 오지 않을 수 없는가를 보십시오. 사람의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고서는 결코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악한 죄인임을 보지 못하고서는 결코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다른 것들이 온유에 앞서 먼저 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죄 성에 의한 가난한 심령과 애통을 통하여 나 자신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게 될 때에만 나의 교만은 없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요 어떤 의미에서든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낍니다. 동시에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주장하기 않음을 의미합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일단락을 짓고 다른 어떤 권리나 공적도 갖고 있지 못한 사실을 보게 됨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그 아무도 여러분을 해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요한 번연은 이것을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이미 넘어져 있는 사람은 넘어질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올바로 볼 때면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아무리 나쁘게 말해도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두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그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를 고맙게 여기고 놀라워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온유의 본질이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온유를 이렇게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 곧 우리 자신, 우리의 권리, 우리의 대의, 우리의 장래의 전체를 하나님의 손에 일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특히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함께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보상하겠다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를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주께서 갚으실 것입니다. 주께서 원수를 친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에게 약속된 복은 무엇인가요? 온유한 사람이 땅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온유한 사람은 이미 이생에서 땅을 얻습니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항상 만족을 얻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만족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골드스미스는 이것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으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더 훌륭히 표현해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만물이 여러분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나아볼로나 게바나 새상이나 삶이나 죽음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온유하여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모든 것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땅을 얻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이 말씀은 미래를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장래의 천국 소망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땅은 천국입니다. 천국은 온유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그들의 전쟁의 승리로 이끌어 줄 분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물질적인 의미에서 곧 정복과 싸움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었고, 주님은 즉각 그들의 생각을 물리쳐 버리셨습니다.
온유는 성령이 직접 만드신 열매입니다. 온유는 우리에게 제공된 것이며 우리들 모두에게 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요? 우리는 스스로 겸손해져서 우리의 사람됨이 부족할 뿐 아니라 철저할 정도로 불완젆남을 부끄럽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문젯거리의 원인이 되는 자아와 절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 희생으로 우리를 사신 주께서 들어오셔서 우리를 전부 소유할 수가 있습니다.
5월 하순으로 접어드니 어디를 가든지 잔디가 전부 파랗게 자랐습니다. 금잔디와 클로버, 어느 것이 더 강할까요? 잔디가 강한 것 같지만, 잔디밭에 그 여린 클로버가 뿌리를 내리면 잔디밭은 변해 버립니다. 부드러운 가죽과 면도칼 어떤 것이 강할까요? 면도칼이 강한 것 같지만, 면도날을 세우려면 보들보들한 가죽에 문질러야 합니다. 부드러운 가죽이 강한 면도날을 마모시킵니다.
이 세상은 누구나 권리 주장으로 피곤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는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이 흠모할 만한 덕일까요? 온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다시 주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내 삶의 모든 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위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을 위하여 내게 허락된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기를 소원합시다. 그때 내 삶 속에 다가올 수 있는 자유, 내 삶 속에서 누릴 수 있는 놀라운 평안 그리고 주님을 닮아가는 놀라운 내 인격의 변화, 이것이 최상의 복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점검할 때, 믿음이 적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절망과 낙심 쪽으로 가지 마십시오. 세상의 완악함에 대하여 나는 저렇게는 못 싸우겠다는 체념과 절망과 왜소함으로 우리 자신이 자꾸 느껴지거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출발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요, 내용임을 확인하십시오. 그래서 지고 살고 참고 살고 용서하며 사는 이것이야말로 내가 키워야 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승리해야 되고 그것 위에 우리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아는 신앙적인 근거 위에 서십시오. 우리의 신자된 삶에 온유와 겸손과 충성과 이런 차원에서의 승리로 우리 스스로를 몰아가는 분명하고 확실한 그리고 새로운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삶의 비밀함과 세상이 모르는 진리와 영원을 소유한 줄 아시고 그 위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