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로버트 머레이 매케인 목사가 시무하는 스코틀랜드 어느 교회에 한 여행객이 찾아 들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매케인 목사가 설교할 때 영적인 힘이 터져 나오고 수천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그는 안내를 받아 그 교회의 여러 곳을 둘러보다가 매케인 목사의 서재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안내인은 목사의 책상을 가리키며 이 방문객에게 ‘한번 앉아 보시지요’ 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앉았습니다. 책상 위에는 성경이 한 권 펼쳐져 있었는데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 성경에다 얼굴을 파묻고 울어 보시지요. 우리 목사님은 설교하시기 전에 언제나 그러신답니다.”
흔히 애통하면 눈물 흘리고 우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애통하면 고통과 저주를 연상하게도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히려 애통을 축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역설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여기서 애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애통하는’ 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펜둔테스의 원형 펜데오로서 이는 심히 근심하며 고통스럽게 슬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아버지 야곱이 애통해 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창 37:34). 야곱은 애통스러운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기 옷을 찢고 허리를 굵은 베로 동였다. 이처럼 이 단어는 속으로 삭일수 없으며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극심한 슬픔을 나타냅니다. 슬픔 혹은 애통을 표시하는 여러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강도가 높은 단어를 주께서는 선택하셨습니다. 극도의 슬픔을 표시하는 단어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보통의 애통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슬픔, 말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절대자 앞에 섰을 때, 그 완전하신 하나님의 눈앞에 비친 형편없는 내 모습으로 인해서 울 수 밖에 없는 이 말할 수 없는 애통! 주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바로 그런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위로라는 단어가 매우 흥미있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가르켜서 보혜사라고도 말합니다. 보혜사라는 말을 성경에서는 comforter(위로자)라고 번역했습니다. 보혜사를 뜻하는 헬라어는 두개의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누구 누구 곁에 나란히”라는 뜻의 전치사 “para”와 부름을 입은 의 뜻을 가진 클레토스 “kletos” 라는 단어가 합쳐져 ‘파라클레토스’ 즉 ‘불러서 내 곁에 서 계신다.’ 이것이 위로라는 단어의 본래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가 나를 위로하고 나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내 곁에 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참으로 애통할 때 성령의 임재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울 때, 우리가 아파할 때, 전능자 앞에서 내 부끄러움울 발견하고 말할 수 없는 아픔으로 주 앞에 엎드리는 그 순간에 성령의 임재하심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애통하기 시작하면 그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나 살던 자신의 죄를 인식하며 애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없이 살았던 삶을 돌이키고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보배로운 피를 흘린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것입니다.
만약 신자들이 애통하면 어떻게 될까요? 신자들의 삶의 장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께서는 아직도 주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나는 다시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부족함에 대해 애통해 할 때 내게서도 회개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회개는 주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내 인격을 성숙시켜 주실 것입니다.
바울의 애통이 그런 애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비단 자기 죄를 인해서 애통해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바라보면서도 애통합니다. 그냥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애통이 일어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사회를 바라보면서, 이 역사를 바라보면서 우리 속에서 동일한 애통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의 눈에는 눈물샘이 마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성령을 보내사 위로하시고 이런 사람을 통해서 그 역사를 고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예레미야의 애통이 이런 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망해 가는 조국, 죄로 가득찬 조국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는 가운데 이런 고백을 쏟아냅니다.. “어찌하여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렘 9;1)
살아있는 신앙인에게는 눈물샘이 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앞에서 내 부족함을 발견할 때마다 주님의 거룩하심 앞에 내 모습이 발견되는 순간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떠나 그분의 기대에 부응치 못하고 살고 있는 내 모습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안타까운 내 이웃의 삶의 모습,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조국의 현장, 이 사회가 흘러가는 방향을 바라볼 때 우리 속에서 눈물이 흐를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눈에는 눈물샘이 마르지 않습니다. 신앙이 메말라버리면 이 눈물이 말라버립니다.
시편 84편 6절에 보면,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인하여 그리고 주님의 뜻이 이 역사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속에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나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웃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인하여 흘려지는 성도들의 눈물을 통해서 주께서는 역사를 치료하십니다. 그들에게 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애통하신 까닭도 이와 같습니다.
그가 ‘슬픔을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 자’이셨던 까닭도 이와 같습니다. 그가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신 것도 이 때문 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오고 삶을 망쳐 놓고 삶을 불행하게 만든, 죄라고 하는 무섭고 추하고 더러운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이 때문에 우셨습니다. 주님은 심령으로 고통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사람이 그를 배척하고 정죄를 초래하는 것을 보고 이 때문에 우셨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을 보고 애통하셨고, 그의 성품을 받고 그를 참으로 따르는 사람도 그래서 애통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바로 죄 그 자체의 성격 때문에 애통해야 하며,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이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 때문에 애통해야 합니다. 참으로 그는 죄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즉 하나님의 철저하신 혐오와 증오, 말하자면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찢고 째려는 이 무서운 실재를 알며 사람들의 이 반역과 오만과 사탄에게 귀를 기울인 결과를 알기 때문에 애통합니다. 그는 이것 때문에 그는 이것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행복한가? 그는 일신상의 의미에서 행복합니다. 자기의 죄의 상태 때문에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회개하려는 사람입니다. 사실은 이미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위에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 받을 것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철저한 죄성과 절망을 보고 구세주를 찾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세주를 발견합니다. 애통의 의미를 먼저 알기 전에주님을 그의 구세주로, 구속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자기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며 하나님 존전에 그의 변호인으로 서 계심을 봅니다. 그는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완전한 준비를 보며 즉각 위로를 받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삶에 있는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의 슬픔은 기쁨으로 화합니다. 그러므로 슬픔이 없이는 기쁨도 없습니다.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위로를 받으며 행복합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의 생활은 이런 식으로 애통과 기쁨이 슬픔과 행복이 교차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즉각 저것으로 화하는 그런 삶인 것입니다.
이제 세상을 위한 위로는 없습니다. 하지만 죄와 세상의 비참성 때문에 애통하는 기독교인에게는 위로, 복된 소망의 위로, 장차 올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비록 신음하긴 해도 동시에 그 앞에 있는 소망 때문에 행복합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궁극적인 영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 영원한 상태에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을 해치는 것이나, 생활의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망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슬픔과 탄식은 다시 없을 것이며,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것이며, 영원한 햇빛 속에서 영원히 그의 빛을 누릴 것이며, 순수하고 온전한 기쁨과 축복과 영광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면 애통하는 사람을 정의해 봅시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슬픈 사람입니다. 하지만 병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슬픈 사람입니다. 하지만 비참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심각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엄숙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신중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퉁명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는 위엄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냉정하거나 부정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의 위엄 속에는 따스함과 끌어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항상 신중합니다. 하지만 심각을 가장하기는 않습니다.
참된 기독교인은 비탄이나 유쾌한 모습을 가장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삶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삶을 영적으로 응시합니다. 그는 삶 속에서 죄와 그 결과를 봅니다. 그는 심각하고 신중한 사람입니다. 그의 전망은 항상 심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와 진리에 대한 이해 때문에 그는 말할 수 없이 영광으로 가득한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속으로 신음한 사도 바울과 같지만 그리스도를 체험함과 장차 올 영광 때문에 행복합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피상적인 사람이 아니며 근본 심각하고 근본 행복합니다. 기독교인의 기쁨은 거룩한 기쁨이요 기독교인의 기쁨은 심각한 행복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엄숙한 기쁨이요, 거룩한 기쁨이요, 심각한 행복입니다.그러므로 그가 위엄이 있고 침착하고 심각하긴 해도 결코 냉정하거나 부정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우리 주님을 닮아서 신음하고 울기는 하지만 그 앞에 있는 기쁨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참으며 수치를 경멸합니다.
이것이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입니다. 이것이 죄론을 설교하고 강조하고, 사람들에게 돌연한 결정을 강요하지만은 않는 과거 시대에 교회에서 볼수 있었던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심오한 죄론과 차원 높은 기쁨의 교리, 이 둘이 합하여 이렇게 애통하며 동시에 위로 받는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을 체험하는 길은 성경을 일고, 연구하고, 묵상하과, 성령께서 우리 속의 죄를 계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충만하게 계시해 달라고 기도하는 길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애통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자신의 죄와 깊은 대면을 해야 합니다.
그냥 피상적으로 자기 죄를 인정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 정도 죄 안짓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손들고 나와 봐”하는 그런 태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본 내 삶의 모습, 내 의식과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죄악의 뿌리를 바라볼때, 나를 하나님 앞에서 멀리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만들고 있는 내 속에 끈끈하게 숨어 있는 죄악의 뿌리를 바라보는 순간,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니! 하는 깊은 탄식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 부서지고 엎드려집니다.
이것은 단순한 죄에 대한 지적 인식 정도가 아닙니다. 나의 존재의 심연에 있는 이 죄를 계속해서 대면하게 될 때에 이 죄에 대한 인식은 죄에 대한 감정적인 연민을 낳습니다. 마침내 애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죄를 바라보는 순간, 그 죄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스르는 모습을 인해서 주님 앞에 엎드려집니다. 주님 앞에 거꾸러지고 깨지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살지 못한 그 안타까운 모습을 인해서 전능자 앞에서 넘어지고 깨어지는 체험, 이것이 바로 애통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 죄를 바라보고 실망하는 것을 잘못하면 자기 학대로 빠질 수가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애통은 단순히 자기 죄 때문에 자기를 학대하는 것을 장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부족과 연약을 알기에, 나를 치료하고 나를 새롭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을 열망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성화의 모티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열망하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거룩한 삶입니다. 행복이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1984년 세상을 떠난 기독교 철학자요 또 우리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일종의 전도자라고 할수 있었던 쉐퍼박사가 있는데, 그 분이 말년에 암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암과 혹독하게 싸우면서 자기 생애에 마지막에 자기가 사랑했던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설교를 하기 위헤서 캠퍼스를 다니면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최후의 메시지를 토하듯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행복을 삶의 목표로 갖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신자도 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행복을 삶의 목표로 갖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구할 바가 못됩니다.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행복을 구하지만 거룩은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영어로는 happiness 라고 하지요. 이것은 본래 happen 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연히 발생하는 것, 우연히 돈을 벌게 되고, 우연히 출세하게 되고 우리는 이런 식의 행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에서의 복은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bleed 즉 ‘피를 흘리다’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본래 앵글로 색슨족은 피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축복으로 간주했습니다. 축복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삶, 이것이 바로 축복인 것입니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신자도 구하는 것입니다. 거룩을 삶의 목표로 구하십시오. 주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지기를 열망하며 이 죄를 제압하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모습을 날마다 닮아 가십시오. 거룩하지 못한 나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주 앞에 엎드러집니다. 나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집니다. 그러나 부서진 나를 일으켜 세우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 그래서 나는 쓰임을 받습니다. 이 거룩을 열망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와 당신은 이 하나님의 거룩을 얼마나 사모합니까? 그리고 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거룩하지 못한 나 자신을 바라보며 얼마나 주 앞에 엎드립니까? 이 안타까운 내 모습, 그토록 신앙 생활을 오래 했으면서도 아직도 형편없는 내 모습, 이것을 보고 얼마나 눈물 흘리십니까?
우리 눈에서 눈물이 흘려지면 우리 가정이 살고 우리 민족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이 없습니다. 값싼 웃음은 있습니다. 세속적인 눈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을 이루지 못한 사실 때문에 흘려지는 눈물, 주 앞에 엎드려 날마다 낮아지는 깨어짐, 이런 모습이 있어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