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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방언, 그것이 알고 싶다] ‘하늘 언어’의 위력

겸손히 2007. 12. 25. 09:52
[방언, 그것이 알고 싶다 ①] ‘하늘 언어’의 위력    김동수  / 평택대 신학과 교수


▲김우현 감독의 저서 <하늘언어> 표지
최근 한 성도와 방언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이 분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신이 속한 교회의 전통에 따라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 입장 내지는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김우현 감독이 쓴 『하늘 언어』라는 방언에 관한 책을 읽고 방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자신은 아직 방언을 체험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방언 체험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방언은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기도 언어로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분이 평상시 자신이 믿고 있던 방언관이 이 책 한 권을 통해 완전히 변하게 된 것이다.

사실 방언 논쟁은 20세기 교회와 신학계를 달군 뜨거운 감자였다. 미국에서 오순절 운동이 태동한 20세기 초에, 그리고 이른바 은사갱신운동(charismatic renewal movement: 방언 운동이 오순절 교파가 아닌 기존 교파로 확산된 운동)이 일어난 1960년대에, 방언은 온 교회를 논란의 도가니에 던져 넣었다. 우리 교계에서도 특히 1980년대에 이른바 성령운동과 제자훈련 운동이 대립하면서 그 핵심 주제는 방언이었다.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와 신학교에서는 방언에 대해 소극적 인정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오순절 교회들은 긍정적 입장의 선봉에 섰다.

그런데 1990년대에 이르러 오순절 운동과 제자훈련 운동이 화해를 하면서 양자는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양대 신앙운동의 화해를 통해 우리 한국 교회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대교회로는 복음주의적 온누리 교회, 사랑의교회, 주안장로교회 등이 복음주의의 노선에 서면서도 오순절 교회 신앙의 장점을 받아들여 성장한 교회들로 알려져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비롯한 오순절 교회들도 복음주의 계열의 제자훈련 운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신학에 대한 사이비 시비 등이 일단락되고 한국 교계에서 주류의 하나로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이제 방언에 대한 논쟁은 진부한 것이고, 이것을 다시 끄집어내어 논쟁거리로 삼는다는 것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고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게 되었다. 사실, 오순절 교회 안에서도 방언은 이제 시들한 것이 되었고, 방언 대신에 복음 송 찬양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오순절 교회에 제자훈련이 도입되면 더 큰 성장이 기대되었지만, 오히려 방언 운동 등이 시들해짐으로써 오히려 오순절적인 요소를 최근에 받아들인 복음주의 교회에 오순절 신자들이 이동해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금번에 사회 저명인사인 김우현 감독이 쓴 『하늘 언어』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방언이 다시 한 번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다. 사실, 방언이 매스 미디어에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방언이 완전히 사라졌다거나 방언 무용론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필자를 비롯한 몇 몇 학자들은 방언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꾸준히 학술 논문을 발표해 왔다. 하지만 이것이 일반 신자들에게 읽힐 수 있는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방언이 무시된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필자도 김우현 감독의 책을 읽고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방언에 대한 진솔한 체험 이야기와 실제 일어난 방언 사건이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호소력이 있는 책이다. 또 저자가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관을 가지고 방언에 대한 성서적 관을 정립하려고 애쓴 모습이 또한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필자는 앞으로 이러한 책들이 많이 출판되기를 기대한다. 사실 방언에 대한 학술 저서와 논문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이 중에서 성서적 이론을 매우 정교하게 제시한 좋은 책들이 많다. 약간 아쉬운 것은 아직은 우리말로 된 것으로는 표준서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외국 저서가 많이 번역되고 우리 학자들이 쓴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차제에 우리는 김우현 감독이 새롭게 화두를 던진 방언에 대해서 성서적으로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우현 감독은 올바르게 화두를 던지기는 했지만 보다 정교한 성서적 견해를 위해서는 전문 학자들이 쓴 책이 필요한 상태다. 사실 필자가 지난 2년 동안 최고로 관심을 두었던 주제는 방언이었다. 또 『신약논단』이라는 학술지에 2006년 봄 호와 2007년 가을 호에 각각 ‘바울의 방언관’과 ‘누가의 방언론’이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고, 오순절신학 학회지에 마키아라는 학자가 쓴 방언에 대한 고전적 논문을 올 해에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글들은 전문 학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필자는 1991년도에 출판된 『성령운동의 제3 물결』(서울: 예찬사)이라는 책의 제1 장에서 방언에 대해서 약 50쪽 분량의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이것을 확대/개정해서 책으로 내는 것을 오랜 숙원으로 여기고 있는데, 올 겨울에는 꼭 그 숙원을 이루고 싶다.

어쨌든 우리는 방언에 대한 성서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정리할 필요가 있다. 방언에 대해서는 크게 네 가지 견해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현대에 교회에서 일어나는 방언은 완전히 비성서적이며 때로 악마적이기까지 하다는 ‘적극적 부정’의 입장이다. 이들은 견해는 다음과 같다. △방언과 같은 기적적 은사는 사도의 표지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주어진 오늘날에는 더 이상 필요없는 은사다. △방언은 있었으나 이제는 그쳤다. △방언은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억울한 감정이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이상한 형태의 하소연으로 나타난 것이다.

둘째, 방언은 바울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있다, 하지만 방언이 신앙생활에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는 ‘소극적 인정’의 입장이다. 이들은 견해는 다음과 같다. △방언은 성령의 열매(사랑)보다 덜 중요하므로 별 필요 없다. △방언은 예언의 은사보다 열등한 은사이므로 별 필요 없다. △방언은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 중요하지 않다.

셋째, 방언의 은사는 신앙 수준의 척도라는 ‘지나친 긍정’의 입장이다. 이들은 견해는 다음과 같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신자는 성숙한 신자이고, 방언을 체험하지 못한 신자는 영적으로 초보 신자다. △방언의 은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없다.

넷째, 방언은 신앙 수준의 척도는 아니지만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은사라는 ‘적극적 인정’의 입장이다. 이들은 견해는 다음과 같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신자는 신앙의 침체에서 쉽게 회복되고 신앙 성장이 빠르다. △방언은 바울이 권장한 것이고, 누가는 성령세례(혹은 성령충만)의 표지의 하나로서 제시한 것이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이 성서적 견해인가? 독자 각자는 각자가 자란 신앙 전통과 자신의 개인 체험에 따라 방언에 대한 입장이 다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전통과 개인 체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최대한 객관적인 태도로, 성서가 말하는 방언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되도록 자신이 지금까지 견지해온 견해를 의심하면서 성서를 무지의 상태에서 읽어보려고 하는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을 권고해 본다.

필자가 아는 한 복음주의계열의 지도자 목사님은 과거에 큰 뜻도 없이 자신이 속한 교파의 전통에 따라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방언을 체험한 사모님과 결혼하면서, 사모님과의 대화를 통해 방언에 대한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고, 후에 방언을 체험한 후에 방언 반대자에서 방언 전도사가 되었다. 과연 우리 각자의 방언에 대한 태도는 성서적인가, 전통적인가? 필자는 앞으로 10차례 이상에 걸쳐 방언에 대한 성서적 입장에 대해서 독자들과 토론해 보려 한다. 보다 구체적인 것은 다음 글에서부터 시작될 텐데 각 글에 대한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피드백을 기대한다.
 
 
 
[방언, 그것이 알고 싶다 ②] 방언은 이제 그쳤는가?

방언은 그쳤는가? 이른바 ‘방언 중지론’은 방언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슈이다. 바울이 방언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고린도전서 13장 8절에 “방언도 그치고”라는 어구가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질문을 심각하게 던질 필요가 있다.

방언은 사도시대 끝난 후 지금은 사라졌다?..“방언은 교회시대의 은사”

약 1백 년 전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심각하게 질문했던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은사들(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오는 초자연적 은사들)은 분명히 사도들에 대한 확증이었다. …(중략)… 그러므로 이 은사들의 기능은 분명히 사도시대의 교회에 국한된 것으로서 사도시대의 교회와 더불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워필드의 신학을 이어받은 신약학자 리처드 개핀(Richard B. Gaffin, Jr.)도 “신약성경의 교훈을 종합해보면 예언과 방언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중지되도록 된 것이며 사실 이미 중지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은사문제에 대한 세대주의자들인 존 월부워드(John F. Woolvoord)와 메릴 엉거(Merril Unger)도 방언의 은사와 같은 기적적인 은사는 ‘사도성’을 표지하는 은사이기 때문에 사도들이 사라짐과 함께 이러한 은사들도 그쳤다고 주장한다.

우선,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오는 초자연적 은사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은사라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목적과 정황을 볼 때 잘 이해되지 않는다. 바울은 여기에서 은사를 언급하면서 사도 문제에 대한 어떤 단초도 제공하고 있지 않는다. 바울이 이 부분을 쓴 이유는 고린도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사 문제로 인한 혼란을 바로잡고 은사를 바로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또 이 은사가 주어진 목적을 보면 이것이 사도들 혹은 사도시대에만 한정된 것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여기서 제시된 성령의 은사가 주어진 목적이 공동체 곧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 은사는 교회와 생사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말로 “유익하게 하려 함이라”고 번역된 말은 사실 ‘공동의’ 유익을 위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전 12:7). 왜냐 하면 유익하게 하려 함이라는 단어에 ‘공동의’(sum)라는 접두어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동의’라는 것은 다름 아닌 ‘교회의’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사도에만 주어진 은사가 아니라 교회시대에 사용되어지도록 주어진 은사이다.

‘신약성서 완성 이후 사라졌다’는 세대주의자들 역시 잘못된 해석

또 방언이 그쳤다고 주장하는 세대주의자들이 성서적 근거로 흔히 언급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 10절의 ‘온전한 것’이라는 문구다. 이 어구가 신약성서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기적의 은사들은 신약성서가 완성되는 때까지만 필요했고, 지금은 당연히 필요도 없고 실제로 그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신약성서 학자들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한다. 제대로 된 신약학자 중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는 내가 아는 한 한 사람도 없다. 여기서 ‘온전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고린전서 주석을 쓴 리처드 헤이스의 다음의 글이 현대 신약학자들의 견해를 잘 요약해 준다 하겠다.

“세대주의 그리스도교 그룹에서는 종종 10절의 ‘온전한 것’(to teleion)이 신약성경 정경의 완성과 그 닫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면서, 카리스마적 은사들은 오직 사도시대에만 해당되며, 현재 교회에서 그 기능은 중단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해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말도 되지 않는다. 이 단락 어디에도 ‘신약성서’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교회 내의 계시성 은사에 대한 미래의 취소 예고도 없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성서가 정경적 글의 새로운 수집으로 보완되리라는 일에 대해 미세한 암시조차 주지 않는다. 본문(고린도전서 13장) 10절은 완전한 것이 부분적인 것을 대체한다는 일반적 금언을 단순하게 말한 것이다. 은사들의 폐지에 대한 바울의 언급(8절)은 명백하게 종말론적 언어를 담고 있는 12절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지금’과 ‘그때’의 대조는 현 시대와 다가오는 시대의 대조이다.”(리차드 헤이스, 『고린도전서』[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6], 378)

즉 바울이 방언을 비롯한 초자연적 은사의 폐지를 미래형 동사로 표시하며 예언적으로 말한 것은 바로 ‘그때’(12절)를 가리킴이고 ‘그때’는 다름 아닌 종말의 때인 것이다. 종말의 때에는 방언을 비롯해 교회시대에만 필요했던 모든 은사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교회시대인 지금은 아직 ‘그때’가 이르지 않았다.

방언중지론자들은 방언 현상을 인위적·사탄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어

세대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만약 방언이 지금 그쳤다면, 현재 전 세계적으로, 또 범 교회적으로 나타나는 방언 현상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해 이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 중 하나밖에 없다. 방언 행위를 사람들이 억지로 지어낸 인위적인 언어행위라고 하든지, 아니면 이것은 성령에서 근원한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근원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패커(James I. Packer)는 방언의 은사가 인위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감정적인 흥분을 동반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면서 어떤 사람의 삶에서 즉흥적으로 시작되기도 하지만, 방언은 정상적으로 배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익힘을 통해서 사실 방언은 ‘익혀지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예를 들어 R. G. Gromacki)은 방언은 양자 사이의 팔과 몸의 진동이라든가 호흡하는 자세라든가 “그 권세 아래 있는 상태에 대한 묘사”가 강신술과 동일하다고 하여, 방언을 ‘사탄적’ 혹은 ‘악마적’인 기원을 가진 것으로 본다.

여기서 우리가 세심하게 보아야 할 것은 위와 같이 방언이 인위적이라거나 사탄적이라는 주장은 이 문제에 대한 어떤 객관적인 연구결과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방언이 사도시대에만 혹은 성서완성시기까지만 존재했다고 하는 세대주의자들의 어쩔 수 없는 논리적 귀결이라는 것이다. 만약 앞의 주장이 확실치 않다면 후의 주장은 자동적으로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인위적인 것으로 혹은 사탄적이라고 보는 것은 성서적, 신학적 근거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 방언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해도 고린도교회와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는 방언을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어차피 악령도 선한 것을 흉내낼 수 있기 때문에 현상적으로 비슷한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본질과 출처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성령으로부터 주어지는 방언을 강신술과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성경과 교회에 대한 모욕이다.

사실 한국 교회 혹은 한국 신학계에서 이런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서양 교회들과는 달리 우리 교회에서는 방언이 교파를 초월하여 광범위하게 교전 교회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우리 한국 교회가 체험적인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러한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이 교회와 신학계에 발붙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상 오랫동안 ‘방언 중지론’이 큰 힘을 발휘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이 주장이 성서적 근거와 토대가 거의 없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 이런 경험이 사라지거나 미약해질 때 이런 주장이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상 올바른 것을 체험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현재의 자기 체험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성이 많기 때문이다. 방언중지론, 그것은 이제 중지되어야 할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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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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